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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감상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근현대사 외 리뷰

by boida 2024. 1. 6.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근현대사 외

전원 옥쇄하라! + 농농할멈과 나 + 라바울 전기

(+ 게게게의 기타로 + 요괴 대도감)

 

 

예전에 이수현 작가님께 들은 말이 있다. 서부전선을 다룬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대히트를 쳤고 지금도 명작으로 회자되는데, 같은 제작진이 거의 비슷한 완성도로 태평양 전선을 그린 퍼시픽은 거의 회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퍼시픽의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함 때문이라고 해석하셨다. 작가님은 서부전선의 잔혹함은 영화나 창작으로 알려지기라도 했지, 태평양 전선의 잔혹함은 대중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서 창작으로 거의 승화되지 못했고, 그래서 도리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몹시 인상에 남는 말이었다.

 

만약 역사의 잔혹함이 잔혹하기에 대중이 픽션으로 즐기거나 감당할 수 없어 외면받고, 기록되지 않고, 그래서 도리어 잊히고 만다면, 잔혹함은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하는 걸까?

 

그 잔혹함을 대중이 감당할 수 있는 필터에 걸러 볼 수 있고, 그것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다.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들이다.

 

미즈키 시게루는 일본 요괴 만화의 거장이며, 젊은 날 태평양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가고 싶으냐는 말에 남쪽이라고 말했다가 태평양 전선으로 끌려간다. 그는 남쪽이 집 근처라고 생각했다. 그 전선에는 신병이 더 투입되지 않아서 미즈키 시게루는 퇴역할 때까지 신병이었고, 부대원이 전부 몰살한 전쟁에서 한쪽 팔을 잃고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맸기에 역설적으로 살아남는다.

 

그의 일본 근현대사, 전원 옥쇄하라!를 보면 이수현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어렴풋이 이해된다. 나치의 잔혹함과 광기의 수준도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일본군의 광기는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넘어선다.

타인을 미워하여 몰살하려는 것은, 물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역사에 있어왔던 일이라 치자. “전원 옥쇄(자결)하여 국민의 정신력을 고취하고 적을 두렵게 하자는 슬로건 아래, 극한의 전쟁에서 극한의 생존력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어린 자국 병사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지도부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마침내 최후의 한 사람까지 끝끝내 죽여 없애는 광기는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가?

 

*

 

미즈키 시게루는 돗토리현에 놀러 갔다가 알게 된 작가다. 내가 원래 돗토리현에 간 이유는 그곳에 아오야마 고쇼의 코난 마을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코난을 만날 생각에 들떠서 가 보니, 같은 현내에 코난 마을보다 더 유서 깊은 미즈키 시게루의 요괴 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돗토리현에 아오야마 고쇼가 태어나기 전에 미즈키 시게루가 태어났으니, 이 한적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두 만화 거장이 태어난 셈이다.

요괴 마을이 훨씬 더 오래되었고 덕분에 더욱 구석구석 아름다웠다. 마을을 가득 채운 독특하고 개성적이고, 정겹고 귀여운 요괴 조각상과 그림에 큰 인상을 받았다. 미즈키 시게루는 인물은 얼기설기한 만화체로, 배경이나 자연은 극사실체와 극세밀화로 그리는 독특한 화풍을 지니고 있는데, 덕분에 그의 작품은 유행을 타지 않고,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고 여전히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일본 근현대사

 

일본 근현대사는 미즈키 시게루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일생을 당시의 일본 근현대사를 따라가며 서술하는 장대한 작품이다. 1권은 시게루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2권은 전쟁의 발발을 다룬다. 3권은 이 네 권 중 핵심이자 절정이며, 3권 전체가 태평양전선 전쟁을 다루고 있다. 4권은 전쟁이 끝난 후 시게루가 만화가로 살아가는 일상 후일담이다.

3권의 내용은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다. 시게루는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살아날 수 없는 상황에서, 요괴가 관여했다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환각과 신비체험과 기적의 연속을 통해 살아남는다. 몰살한 부대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해 돌아왔으나 영웅으로 치하받기는 커녕, 늘씬 두들겨맞은 뒤 이미 위에 장렬하게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갔으니 얼른 죽으라는 옥쇄(자결)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시게루는 팔을 잃고 말라리아에 시달리는 산송장 상태로 병원에 있느라 역설적으로 살아남는다. 잘려진 팔에서는 구더기가 끓고 약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 굶어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천성적인 낙천성과 먹성과 생명력으로 매일 병영을 탈주해 원주민들에게 밥을 얻어으며 살아남는다.

 

일본 근현대사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의 가난한 하층민의 눈으로 일본 안에서 직접 본 일본의 모습이다. 도저히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감당할 자원이 없었던 작은 나라가, 자신들이 신의 군대라는 집단환각에 빠져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을 때, 그 착취가 어느 수준의 참혹함에 이르는가를 보여준다.

 

책에는 조선에 대한 언급이 거의 나오지 않지만, 자국민을 그 정도까지 수탈하고 학살한 국가가 과연 식민지 국민에게는 어떠했을까를 상상하게 한다. 더해서 우리는 주로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보았던 시대가 정작 일본 안에서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가를 다른 방향에서 이해하게 해 준다.

잠시 지나가는 형태지만 시게루가 직접 목격한 조선인 위안부의 모습도 등장하며, 요새 슬램덩크 극장판의 배경으로 등장하여 화제가 된 오키나와 주민들이 겪었던 참상도 등장한다.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가 첨예한 지금, 많은 분들에게 추천한다.

 

전원 옥쇄하라!

그의 라바울 전투 체험기를 다소 압축하고 각색한 작품이다. 일본 근현대사에 같은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이 책을 읽고 일본 근현대사3권을 보면 창작은 역시 현실의 잔혹함을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하거나 무난하게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일본 근현대사의 두꺼움이 부담스럽다면 추천한다.

 

농농할멈과 나

모두 이어지는 작품군이다. 역시 일본 근현대사1권의 에피소드들이 고스란히 등장하여 그 이야기들이 다 사실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 체험담에 농농 할멈을 중심으로 요괴 민담을 섞어 보여준다. 완숙한 전개와 아름다운 자연풍경이 담긴 작품으로, 요괴를 좋아한다면 무조건 추천한다.

 

미즈키 시게루의 라바울 전기

이번에는 수기다. 역시 같은 내용이지만, 미즈키 시게루가 현장에서, 또 돌아와서 그린 실사풍 그림이 삽화로 그려져 있다. 미즈키 시게루는 전쟁의 체험을 기록하려 했다가 생활고로 포기하고 중단한 듯하고, 노인이 된 뒤에 책을 마무리지은 듯하다. 그래서 후반부는 화가가 아니라 만화가가 된 미즈키 시게루의 만화풍 그림이 새로 삽화로 그려져 있다.

 

《게게게의 기타로》

위의 책들과 같이 읽다보면, 미즈키 시게루의 대표작인 《게게게의 기타로》가 혹시 시게루의 체험에서 나온 사실주의 작품이 아닌가 싶다. 전쟁 한복판의 기이한 광기의 체험담은 때로는  요괴의 장난으로밖에는 해석이 어렵지 않았을까. 기타로는 눈에 띄는 특별한 능력 없이, 선악의 구별조차도 없이, 오직 ‘생존력 하나로 요괴와 싸워 살아남는 소년인데, 아무리 봐도 시게루 자신의 반영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그 시대에 살아남은 사람들의 반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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