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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잡상

2015년 4월 만화잡지 보고에 실은 에세이(2020/03/08)

by boida 2023. 6. 11.

아이처럼 공부하기
- 김보영

1.

소설에서 내가 과학적으로 맞게 쓴 것을 편집자가 말없이 고친 경우가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은하계 중심부에 있는 별에서 본 하늘을 묘사했을 때였다. 별이 조밀하게 모여 있어 하늘이 별빛만으로도 낮처럼 환하다고 썼는데 편집자가 한숨이라도 쉬듯이 그 부분을 고쳐놓고는 표시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빛의 속도를 넘으려면 질량이 허수여야 한다고 쓴 경우였다. 편집자는 막 인쇄 넘겼다면서 가볍게 웃으며 “‘허수’라고 쓰신 것만 ‘음수’로 고쳤습니다.”라고 했다. 허겁지겁 메일을 보내 관련 자료와 설명까지 곁들어 허수라고 고쳐주었다. 편집자가 허수가 말이 되느냐고 물었다. 나는 음수는 말이 되느냐고 되물었다.
그건 내게 꽤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가 맞았든 틀렸든 두 편집자는 내가 쓴 부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확고한 신념으로 수정하고는, 상큼하게 웃으며 “당신의 실수를 고쳐드렸습니다.”라고 했을까.

2.

남의 실수 이야기가 재미있기는 하지만, 남이 하는 실수는 언제나 나 자신도 한다.
전에 나는 기온이 낮아 물이 상온에서 얼음으로만 존재하는 세계에 대한 소설을 쓴 적이 있다. 지구에서 ‘유기생물’이 사라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온도를 낮추는 것이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생물이 없으려면 물이 없어야 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 ― 60~70도℃의 쾌청한 날씨…….” 같은 표현을 써 놓고 몇 년을 내버려두었다가 세상에 내놓을 즈음에 허겁지겁 단위를 고쳤다. 섭씨(℃)가 물이 어는점과 끓는점을 기준으로 만든 단위라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물이 없는 세상에서 물을 기준으로 삼는 단위를 쓸 리가 없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까지 섭씨℃라는 단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건 그저 익숙한 무엇이었을 뿐이다. 익숙하지 않은 세계를 배경으로 글을 쓰다보면 이런 사고는 왕왕 일어난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TV에서 하는 영화 “미션 투 마스”를 보다가, 우주 미아가 되어 날아가는 동료를 구하러 여자가 우주유영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런데 여자가 중간에 돌아갈 연료를 생각해서 “잔량 51%”에서 멈춰 버리는 것이었다! 나름 SF영화 꽤나 본 친구들이라 다 어리둥절해졌다.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멈춰?”

물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계속 연료를 공급해야 하는 건 마찰력과 중력이 있는 지구에서뿐이다. 우주 공간이었니 여자는 처음 출발할 때에만 연료를 썼으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속도를 0으로 만들려면 속도를 낸 만큼의 연료가 필요하다. 51%에서 멈추려면 남은 연료를 다 써야 했을 거다. 다 끝났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에 멈출 수도 없다.

요는, 그렇게 대자본을 들이고 수많은 과학자의 자문을 받고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관여한 작품이라 해도 한국 어디 구석에 사는 평범한 시청자들이 대뜸 “쟤 지금 뭐하는 거야?”하고 지적할만한 실수를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작가의 지식부족처럼 보이는 것이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앞서 말한 작품에 대해 한 독자가 “과학적으로 틀린 곳이 많다”는 평을 했다. 메일을 보내 어디가 틀렸는지 말해주면 고치겠다고 했다가 “―60도라면 어떤 생물도 살 수 없으니 소설 후반에 등장하는 생물의 번성은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나는 그 사람에게 동일한 기온의 지구 남극에 펼쳐지는 찬란한 생태계와, 그곳에서 짧은 여름동안 단 하루 만에 자라나 씨를 뿌리고 번성했다 1년 내내 잠드는 식물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또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맞지 않는 것들이 많을 테니까.

우리는 종종 자신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진다. 전혀 관심도 없고 공부한 적도 없는 무엇인가에 대해 “내가 알고 있으리란” 거대한 확신으로 무장하고 살아간다. 사실 살아가는 데에는 그런 확신이 필요하기는 하다. 모르는 것을 일일이 따지며 살다간 건널목도 못 건널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아는 것만 알 뿐이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그저 익숙한 것일 뿐인 것을 ‘안다’고 믿는다. 앞서 이야기한 그 편집자에겐 ‘허수’보다 ‘음수’가 더 익숙한 단어였을 것이다. 그래서 기이한 확신으로 그 단어가 더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3.

전에 내게 “어떻게 과학을 공부하느냐”고 질문하신 분이 있다.

SF만 쓴지 11년째인데 내게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아직 그 분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내가 소설에 과학적으로 맞는 소리를 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고, 뭔가 문학적인 상징으로 가득한 헛소리를 늘어놓았으리라 가정하는 것 같다. 나를 좋게 보는 나머지 사람들은 내가 마치 ‘응애’하고 날 때부터 칩 같은 것을 머리에 꽂아서 과학지식을 장착하고 태어난 사람처럼 대한다.
그분은 내가 과학을 ‘공부하고’ 있으리라고 가정해주신 것이다. 현명한 분이었다.

나는 그때 “애들 학습만화로 공부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나는 그 현명한 분이 배를 잡고 웃는 것을 보았다. 농담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진지하게 답하자 사람들이 알면 웃을 거라고 했다.

정말이다. 나는 애들 책을 본다. 나는 ‘앗’ 시리즈(주니어김영사)를 좋아하고 “살아남기”(아이세움) 시리즈와, 노빈손(뜨인돌) 시리즈를 본다. 스쿨버스 시리즈(비룡소)도 간혹 본다. 그 외에 귀여운 제목을 달고 예쁜 그림이 그려진 아이들 책을 어린이 도서관에서 아이들과 같이 본다.

여러분이 이 글을 보고 비웃으실지 혹은 농담으로 여길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내가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젠가 SF쓰기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만났을 때, 그 분들 가방에서 ‘코스모스’나 ‘우주의 구조’ 같은 과학서적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건 좋은 책들이다. 하지만 왠지 그 책들을 보자 언젠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보자. 만약 당신이 처음 러시아어나 그리스어를 공부한다고 치자. 무슨 책을 집을 것인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도 대개는 글자 읽는 법부터 배울 것이다. 그런 뒤에 그 나라의 한두 살짜리 애들이 볼 만한 동화책을 보며 간단한 인사를 외울 것이다. 그러다가 유치원생이 볼 법한 그림책 같은 것을 볼 것이고, 그 후에 청소년이 볼만한 간단한 텍스트로 옮겨갈 것이다. 처음부터 문학 서적이며 신문이나 뉴스를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다짜고짜 대학교수나 볼 법한 두꺼운 책을 사 들고는 고통에 빠졌다가 ‘나는 과학에 재능이 없어서’, 혹은 ‘내가 과학을 원래 안 좋아해서’ 하고는 던져버린다.

4.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중학생과 고등학생 수준의 과학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배웠고 시험을 치기도 했기 때문이다. 중력이며 가속도며, 힘의 공식이며 열역학 법칙이며, 뭐 이런 것들을 배웠고 책도 봤고 노트필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들어본 적이 있는, 내게 익숙한 어떤 단어일 뿐이다. 우린 지금 그게 뭔지 하나도 모른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라는 착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환상이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조금 과하고 질척질척한 편이다. 좀 복잡한 문제지만, 나는 이 나라에서 ‘앎’이 지나치게 권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학교 내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많이 아는 사람이 떠받들리고, 모르는 사람은 모욕당하고 괄시받으며, 핍박과 모독을 받는 것이 당연한 환경에 오랫동안 노출된 채로 성장했다. 전자는 당연할 수 있어도 후자는 당연하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은 성인이 된 뒤에도 ‘모르는’ 것에 접근하는 것을 피한다. 그것이 제 신분을 자각하는 일이며, 고통에 직면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이미 잘 다져진 ‘안다는 환상’을 지키기 위해 마찬가지로 모르는 것에 접근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둘 다 다시는 책을 보지 않는다.

인정해야 한다. 배운 건 다 날아갔다. 날아갈 만하게 배웠다. 원리를 이해하는 교육이 아니었다. 그 많은 시간을 들여 삽질했고 청춘을 낭비했다. 가슴 아프지만 어쩌랴.
다 비우고 생각해보자. 당신이 지금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과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면 지금 무슨 책을 집을 것인가.

5.

아동용 학습만화로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아이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이 잘 되어 있다.

농담 같지만 중요하다. 어차피 하는 공부다. 쉽게 하자. 공부가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은 이 나라 학교가 해 놓은 거대한 거짓말 중 하나다. 지금 읽는 책이 어렵다면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책이 잘못한 거다. 그만두고 얼른 쉬운 책으로 내려가자. 유아용으로 내려가도 상관없다.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대학자라도 자신이 공부한 분야 이외의 것을 알 방법은 없다. 빨리 익힐 수는 있어도 안 본 시점에서는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인지 자신이 공부하지 모든 영역에 대한 혜안이 있으리란 거대한 착각에 빠져 산다.
무슨 책을 읽었는지,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세상에 자랑할 필요도 없다. 한 권을 읽든 백 권을 읽든, 당신이 지금 쓰려는 것의 바닥과 기본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때로는 한 권으로도 충분하다.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이해하지 않으면 마찬가지로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소설도 쓸 수 없다.

2) 정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종종 착각하는 것이, 과학은 인문학과는 달리 명확하고 완전한 단 하나의 답만 있으리라고 믿는 점이다. 내가 감히 생각하기로, 과학의 정설은 인문학의 정설만큼이나 적다. 그 외에는 논쟁과 미지와 탐구의 영역이다.
베스트셀러 과학서는 오히려 주의하는 것이 좋다.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것은 기존의 정설을 위협하는 혁명적인 새로운 가설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다시 말해 정설이 아닐 수 있다. 너무 빤해서 아무도 찾지 않는 책이 나을 수도 있다. 너무 오래된 책도 주의하자. 이미 뒤집힌 가설일 수 있다. 인터넷 자료도 주의하자. 아직 검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동용 책은 안전한 선택이다. 과학자들은 제 주장이 강한 편이고 종종 새 이론을 주장하며 학계 전체와 싸운다. 하지만 그런 과학자들도 아이들을 위한 책을 쓸 때에는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정설만을 골라 싣는다.

3) 많이 볼 수 있다.

비슷한 이야기다. 독학을 하는 사람이, 또 짧은 시간에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알기 어려운 것이 그 학계에서 무엇이 정설이고 무엇이 가설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통계의 영역이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책을 봐야 이 감각이 생긴다.
과학자가 직업이 아닌 사람이 무수히 많은 책을 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동용 책은 앉은 자리에서 수십 권도 볼 수 있다. 어떤 말은 모든 책에서 반복된다. 반복되기에 기억하게 된다. 반복되는 빈도가 중요도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면 대강 감을 잡을 수 있다.

4) 기본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응용서를 보면 따라하거나 베낄 수 있을 뿐 새로 만들 수가 없다. 하지만 기본 원리를 이해하면 응용할 수 있다. 창작은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작업이다. 남이 만들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려면 가장 바닥을 보는 것이 좋다.
기본을 알아야 상상도 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상상을 정보의 바다를 뒤져 찾을 생각을 하면 한이 없다. 먼저 상상하고 관련된 이론을 찾는 것이 좋다. 하지만 기본 없이 한 상상은 관련된 이론이 나와주지 않는다.

5) 그림이 있다.

창작은 이미지를 그려내는 작업이다. 글로 얻은 지식은 다른 글로 옮기기 어렵다. 하지만 만화는 그림으로 가득하다. 색깔, 모양, 빛, 우주선이나 기계의 구조를 열심히 구현한 화가의 노력은 작가에게 큰 도움이 된다.
나는 뉴턴 잡지를 좋아하는데, 화보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광행차현상(아주 빨리 달릴 때 빛이 기울어지며 진행방향에 집중되는 현상)이 어떤 풍경일지 궁금해 했는데, 최근에야 뉴턴 잡지에서 화보를 보고 감을 잡을 수 있었다.

6) 겸손해진다.

너무 힘들게 공부하면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내 노력을 자랑하고 지식을 자랑하고 싶어 입이 간질간질해진다. 하지만 그러면 소설은 망한다.

SF에 들어가는 과학지식은 영화의 CG나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CG가 영화를 화려하게 하고 멋지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은 CG는 언제나 꼭 필요한 곳에 최소한도로 들어가야 한다. 맥락 없이 CG만 들이부은 소설은 쓰지 않느니만 못하다.
아이들의 책을 보다보면, 내가 아는 것이 얼마나 없으며 또 다 아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저 필요한 만큼 조금 더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러면 된다. 제가 잘 안다는 오만에 빠져 쓴 것은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 써도 바보스러운 것이 된다. 소설은 늘 그런 점에서는 여지없이 민낯을 드러낸다.

6.

요새도 과학적 개념을 소설에 넣어야 할 때에는 종종 어린이 도서관에 간다. 앉아서 몇 십 권을 훑어본 뒤에 청소년 책으로 옮겨 간다. 그런 뒤에 성인용 교양서로, 다음에 전문가를 위한 책으로 올라간다. 한 달 사이에 수십 년을 자라나는 아이처럼.
의례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게 쉬워서 그렇게 한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전문가용 과학서를 집어 든다면 한 달을 다 써도 그 책 하나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거다. 하지만 어린아이에서 부터 천천히 올라가면 한 달쯤 지나면 대개는 쉽게 어른의 자리에 도달한다.

공부하는 게 SF만의 특이한 점은 아니다. 무엇에 대해 글을 쓰든 작가는 공부를 한다. 자료조사를 위해 뛰어다니고 인터뷰를 하고 하염없이 책을 쌓아놓고 본다. SF는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점이 오히려 다르게 접근하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쓸 때에는 아이 같은 마음으로 쓰라고 한다. 뭘 이루려 하거나 잘 보이려 하거나, 누구를 감동시키고 가르칠 생각을 하면 바보 같은 것이 나온다. 아이 같은 마음을 갖기가 간단하지는 않다. 공부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며 그것이 당연한 자연스러운 사실이라는 것도 안다. 부끄럽거나 책잡힐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 마음을 갖기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간단한 일이 아닌 만큼, 갖게 되었다면 자랑스러워해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