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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잡상

방통대 법학과 졸업한 소고(2019/04/21)

by boida 2023. 6. 11.

방통대 법학과는 박근혜 당선소식을 들은 다음날 입학원서를 내서 들어갔다.

“이 세상에서 날 지키려면 법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1년 반 뒤에 세월호가 있었고 세상이 총체적으로 망가져만 갔다. 그때부터는 법을 알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때려치웠다가 탄핵이 되고도 한 해가 더 지난 작년에야 남은 한 학기를 채워 졸업했다.

4년을 전업(?)으로 심리학만 공부했어도 심리학에 대해 아는 게 없는데 2년을 직업과 겸업해서 공부하는 정도로 어떻게 법을 알겠나.

단지 심리학과를 나왔기에 적어도 심리학 분야에 관해서는 돌아가는 기본체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그건 기본 원칙을 어기잖아.” 정도는 알 수 있고, “흔한 착각인데 절대로 아냐.” 정도도 말할 수 있고, 의문이 생겼을 때 어떤 단어로 무엇을 검색하면 되는지는 안다. 그만해도 일생 도움이 되고, 실은 일반인과도 크게 다르다.

졸업한 감상은, 노동자라면 어디서든 어떻게든 노동법과 근로기준법은 배우는 것이 좋고, 창작자라면 어떻게든 저작권법은 배워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계약서를 쓸 때마다 법 공부는 도움이 되었고 지금도 도움이 된다.

각설하고, 방통대는 내가 지금까지 다녀본 학교 중에서 가장 좋았다.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절대평가다.

절대평가다.
시험을 보기 전에 몇 점이 A이고 몇 점이 B고 F인지 알 수 있다.

1학년 수업을 처음 들어갔을 때, 학생회 사람들이 스터디 홍보를 하며 “우리 다 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모두 A+ 맞고 모두 장학금 타요!” 하고 말했다. 경이로운 말이었다. 나는 그런 말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이고 가능하다. 변별력은 어떻게 되느냐고? 통계의 마법에 의해 결과적으로 정상분포가 된다. 결국 절대평가와 상대평가의 차이는 행복하게 정상분포가 되느냐, 불행하게 정상분포가 되느냐의 차이가 아닌가.

시험기간은 더 신비로웠다. 다 같이 열정적으로 족보를 알려주는 것은 물론, 시험 중 쉬는 시간에도 조금이라도 더 아는 사람이 주위에 다음 시험문제와 답을 소리 높여 알려준다. 이런 풍경을 내가 살아오며 언제 보았던가?

단지 “저 사람의 시험점수가 나의 시험점수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행동방식이 완전히 변한다.

맹자가 이르기를 사람은 본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사회가 그리 만든다 하지 않았던가. 선생님들이 방통대 학생들이 제일 친하고 학업분위기도 제일 좋다고 말하는데, 광고성 멘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서로의 성취가 서로의 성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가운데 같이 지낸다면” 자연히 그리 되지 않는가 한다.

2. 등록금이 싸다.

방통대의 한 학기 등록금은 35만원이고, B 이상이면 반액, A 이상이면 전액 장학이다. 공부를 잘하면 돈이 생긴다! 그 외에 다양한 형태의 장학금이 있어서, 웬만하면 공짜로 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부담이 없다. 이번에 낙제해도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되지! 이번 학기에 목맬 필요도 없다.
<지금 잘 못해도 얼마든지 다시 할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이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공부는 그래야 하지 않는가?

3. 공부의 목적이 공부다.

이 학위로 딱히 무엇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공부의 목적이 공부다. 

(나중에 추가 : 자격증 따는 전공도 다수 있고 교육학에 간호학에... 당연히 엄연한 학사 학위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미 학사가 있거나 직업이 있는 사람의 몹시 느슨한 워딩이었습니다...)

법학과에 온 사람들은 자영업자거나 회사원이거나, 각자의 이유로 법공부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지식에 있지 학위에 있지 않다. 내내 수업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수업 시간에 자는 사람도 딴짓하는 사람도 없고, 수업이 끝나면 선생님을 붙들고 하나라도 더 물어보려고 줄을 섰다.

그러니까, 공부는 공부로 딱히 뭘 할 수 있는 게 없어야 한다. 그게 맞지 않은가?
 
4. 학생과 선생의 관계가 동등하다

학생 대부분이 선생보다 나이가 많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건 수업 내내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었다.
학생회에서 준비해두는 과자며 음료수를 책상에 잔뜩 쌓아놓고 먹으며 수업하면서 생각했다.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롭게 수업을 들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간식 먹으며 수업 들으면 안 될 건 또 뭐였단 말인가? 내가 집중하는 데 도움만 될 수 있다면.

*

... 그렇게 졸업을 하고 보니,

교육정상화가 그렇게까지 머나멀고 불가능한 문제인가 싶다.

1. 절대평가를 하고
2. 무상교육을 하거나 등록금을 싸게 하고
3. 실패해도 다음 기회를 주고
4. 학위로 딱히 인생이 변하는 게 없도록 하면


정말이지 이 사회는 백 번 반성해야 한다. 세상에 공부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데, 학업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지옥으로 만들 수 있는가.

*

실은 절대평가를 하는 것만으로 이 사회의 많은 것이 변하리라 생각한다.

너의 성취와 나의 성취가 서로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아, 그리고 나는 그게 너무나 좋았다.

“변별력은 어쩌냐고?” 통계의 마법을 믿으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