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잡상

분위기 파악하지 않기(2017/08/26)

by boida 2023. 6. 11.

여자애들도 운동장에서 뛰어놀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공격 받는 선생님이 계시다고 하여 올려놓습니다.
작년 2016년 상반기 ‘내일을 여는 작가’(한국작가회의) 69호에 실은 글 중 일부.


분위기 파악하지 않기


얼마 전에 스스로를 SF작가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젊은 작가 둘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화중에 나온 이야기가 있다.

“내가 왜 SF를 쓰고 있나 생각해보니까, 분위기 파악을 못했어요.”

그들 중 한 명은 국문학과였고 한 명은 문예창작과였다. 교수님의 시선, 선배와 동기들의 시선, 그 안에서 돌아가는 분위기를 생각했을 때, SF는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분위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 어릴 적 일이 떠올랐다.

*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태권도 학원을 다녔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나쯤 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운동을 할 바에는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무술을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았다.

학원을 끊은 다음날 학원에 가다 친구들을 만났는데, 도복을 입은 나를 보더니 얼굴을 “파삭” 구기는 것이었다. 못 볼꼴을 본 얼굴로 나를 외면하면서 창피하지도 않느냐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태권도복을 입은 아이들은 동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으니까.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은 내 성별이었다.

다음날 우리 반에는 전교생이 몰려와 창문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나를 구경했다. 그들은 ‘이 반에 태권도를 하는 여자가 있다’며 온종일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 난리법석은 학년이 올라가고 반이 바뀌는 내내 나를 쫓아다녔다. 반이 바뀔 때마다 반에 제일 먼저 퍼지는 소문은 “이 반에 태권도를 하는 여자가 있다”였다. 중학교에 가면 이 소동이 멈출까 싶었는데, 우리학교에서 같이 진학한 몇 아이들이 입학 다음날부터 ‘이 학교에 태권도를 하는 여자가 왔다’며 신이 나서 떠들고 다녔다.

나는 그 와중에도 태권도를 다녔다. 진지하게 운동을 할 생각은 없었던 터라 다니다 말다 했지만 고등학생 때까지도 다녔다. 왜 그랬나 생각해보니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분위기 파악을 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일본 드라마 ‘리갈 하이’의 한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변호사가 이지메에 대해 하는 말이 있다. “여러분은 이지메에 저항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지메는 분위기다. 분위기는 모든 것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맞서 싸우기는커녕 도망치기도 어렵다.” (...) ‘분위기’는 공기와 같아서 존재를 증명하기는 지극히 어렵지만, 공기와 같아서 그 위력은 괴물처럼 강력하다.


중학생 때였나, 간만에 책을 좋아한다는 친구를 만나서 기쁘게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 친구는 내가 신이 나서 좋아하는 SF를 늘어놓자 얼굴을 ‘파삭’ 구기며 “뭐야, 책 하나도 안 봤잖아?” 하며 벌떡 일어나 자리를 옮기더니 이후로 다시는 나와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데뷔한 ‘과학기술 창작문예’는 원래 ‘SF 신춘문예’여야 했지만, 관여하는 분들이 ‘품위 없게 어디 SF라는 말을 붙이는가’하며 정색하는 바람에 기괴한 이름이 되었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린 작가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였고 SF작가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한국 비평가들에게 “SF가 아니라 문학이다.” “기존의 SF와 궤를 달리한다.” “통상의 SF와 다르다”는 자기분열적인 비평을 당한다.

*

분위기가 분위기로만 끝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종종 남자들이 회사에서 정수기를 갈지 않는 여자를 성토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그런 말을 볼 때마다 내 체험을 생각하곤 한다.

태권도를 하면서 나는 훨훨 날지는 못해도 제법 건강한 몸을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특별히 아픈 적 없고 딱히 병원 한 번 간 적이 없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생이 된 내 친구들은 믿을 수 없이 약해졌다. 백 미터를 못 달리고 중간에 멈춰 걷는가 하면 멀리뛰기 한 번 하고 며칠을 끙끙 앓기도 했다. 체력장에서 하는 운동장 한 바퀴 달리기는 다 뛸 수 없는 학생이 너무 많아서 반 전체가 손을 잡고 천천히 달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몸이 약해진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성장기에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믿을 수 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내가 겪은 그만한 분위기 속에서, 내 주변의 여자 아이들이 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그랬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얌전히 따른 대가는 또 뭐란 말인가. 정수기 물통도 갈 수 없는 약한 몸으로 자랄 뿐이다. 그러면 육체적인 일을 못하는 약한 직원이라며 월급을 적게 받아도 되는 사람이 된다. 월급을 적게 받는 직원이므로 가정에서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게 된다.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1순위 해고자가 된다. 1순위 해고자가 되면 사회활동을 하는 여자는 줄어들고, 사회활동을 하는 여자가 눈에 띄지 않으면 이는 여자는 실력이 없다는 증거로 이용되고, 다시 사회에서 기용하지 않을 이유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 정수기 물통을 가는 건강한 여자는 칭찬을 들을까, 칭찬은 돌아온다. ‘여자가 아니다’라는 칭찬. 나는 그 말을 칭찬이랍시고 회사를 다니는 동안 많이도 들었다. SF를 쓰는 작가들이 종종 ‘SF가 아니다’라는 말을 칭찬이랍시고 듣는 것처럼. 해맑은 모독이다.
최근 크게 흥행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이것은 SF가 아니다.’는 말이 칭찬이랍시고 붙었다. 최고의 주가를 올린 만화 『미생』의 띠지에는 ‘이것은 만화가 아니다’라는 말이 최고의 찬사인 양 붙어 있다. 해맑은 모독이다.


*

(중략)


장르영화가 세계시장을 휩쓸고 있다든가 웹소설 작가가 월 수억의 수익을 번다든가 하는 문제는 다른 문제다.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 또한 하나의 모독이다.

나는 그저 사람이 자기가 좋은 것을 좋을 대로 해도 괜찮은, 사회의 유연성을 소망한다. 그것이 우리 모두의 삶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여자아이가 태권도복을 입고 거리를 걸을 때 얼굴을 파삭 구기는 대신 ‘아, 그렇구나’ 하고 가던 길이나 가는 예의, 문예창작과 학생이 장르소설을 쓴다고 했을 때 얼굴을 “파삭” 구기는 대신 ‘아, 그렇구나’ 하고 가던 길이나마 가는 예의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