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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식/작품소식(국내)

[얼마나 닮았는가] 문목하 추천사 (2020/10/14)

by boida 2023. 6. 10.

(박제하고 싶어서 옮겨놓습니다.)
(박제하고 싶어서 옮겨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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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예찬을 하고 싶어서
인간 세상에 방문한 중단편의 신

문학의 전당에는 아담한 통로가 하나 따로 나 있어야 한다. 느리지만 꾸준히 일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을 때 독자가 버선발로 뛰쳐나와 마중 갈 수 있는 통로가 필요하다. 아마 전 세계 대부분의 애독자가 이 통로를 자신의 것으로 삼겠지만, 나는 조용히 통로 끄트머리에서 하나의 이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김보영의 신간이 나왔으니, 환호하며 버선발로 뛰어나갈 순간이 왔다.

여러 선집의 형식으로 출간된 김보영 작가의 다양한 단편들을 챙겨 읽은 독자들은 <0과 1 사이>, <고요한 시대>,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로그스 갤러리, 종로>, <얼마나 닮았는가>와 같은 기존작이 대부분의 페이지를 차지한 이 소설집이 최신작으로 느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로 서점 산책을 통해 책을 만나는 독자라면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엄마는 초능력이 있어>, <빨간 두건 아가씨>, <니엔이 오는 날>, <걷다, 서다, 돌아가다>, <같은 무게>가 새롭게 읽힐 것이고, 무엇보다 여러 권의 단편 선집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값진 단편들이 한 권의 책으로 깔끔하게 묶였으니 흡족하지 않을 수 없다.

전율을 주는 초기 중단편들이 최근 하나둘 새 판본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 책에는 그 중 <0과 1 사이>가 실렸다. 이 단편만 따로 뽑아내 금칠한 종이에 은으로 글자를 새겨 작은 책 한 권을 만들어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만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다른 단편들 사이에 섞여 비교적 겸허한 형태로 출간된 듯하다.

이 책엔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수작들이 빼곡하다. 물론 일부 단편들은 수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0과 1 사이>,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얼마나 닮았는가>는 (물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수작이라 할 수 없다. 이 세 편은 걸작이기 때문이다.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독자들이 걸작을 세 편 연속으로 읽다가 과도한 희열에 충격받지 않도록 중간중간 수작을 끼워 넣은 배려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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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모든 출간작을 통틀어 상당수의 작품은 스포일러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반전과 트릭이 잘 사용되기도 하지만 꼭 반전이 있지 않아도 김보영의 작품은 사전지식 없이 깨끗한 눈으로 읽을 때 더 깊은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김보영 작품의 불가사의는 감정에 호소하는 의도적 장치를 많이 넣지 않았는데도 온갖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이 작가는 감정으로 감정을 증폭시키는 게 아니라 사건으로 감정을 북받치게 하는 방법을 잘 안다. 몇몇 걸작의 경우는 고작 삼십여 페이지를 읽는 동안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대부분의 주요한 감정을 모두 느끼게 해준다. 슬펐다가 분노했다가 감동적이었다가 애절하다가 충격적이었다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슴이 울리는 경험을 했는데 그 엄청난 게 삼십 페이지 때문이라니 기가 찰 따름이다.

김보영은 단편 하나에 아주 많은 심상과 다양한 감정을 배치해 (두려울 정도로) 조화롭게 엮어내는 작가인데, 그 때문인지 장편보다 중단편을 더 밀도 높게 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도 바로 그 특유의 밀도를―모든 문장 한 줄 한 줄이 자기 역할을 가지고 있고, 모든 장면이 의미와 재미와 감동 중 최소 하나 이상을 품고 있는 엄청난 밀도를― 자랑한다. 거의 신기에 가까운 밀도를 보여주는 단편들과 그보다 좀 더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가볍게 쓰인 엽편들이 주는 감동과 충격은 만만치가 않다. 밀도 있는 잘 쓴 글이 주는 행복이야말로 우리가 서점을 찾고 애타게 책 사이를 누비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김보영의 작품은 우리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그 이유 자체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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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정연한(그래서 아름다운) 자연적 현상을, 비논리적인(마찬가지로 그래서 아름다운) 삶의 현상과 연결 지어 그 둘이 전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 서로 이어진 하나의 현상임을 김보영만큼 탁월하게 이야기하는 작가는 여러 시대를 통틀어 찾기 어려울 것이다. 과학은 자연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 안엔 인간도 포함되는데, 김보영이 그리는 인물들을 볼 때마다 이 사실을 반복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과학을 하는 인간이 아니라 과학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은 인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이기 때문에 아름답다. 우리가 흔히 인간성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복잡한 변덕과 애정과 고뇌는 우주적 스케일로 보면 작은 과학적 현상의 하나인 것이다. 김보영의 작품에서 인간은 과학의 일부이기에 아름답다. 달리 말하자면, 무언가의 일부여야만 인간은 아름다울 수 있다. 김보영의 세상에 홀로 아름답고 홀로 고매할 수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그리고 그것은 진실이다).

SF가 경이감을 주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그 중 특히 ‘규칙을 다르게 설정하는 것’과 ‘기준을 다르게 설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을 텐데 김보영은 그 둘 다 잘 쓰는 작가다. 한 작품에서 저 중 하나만 잘해도 좋은 작가인데 저 둘을 동시에 해내니 솔직히 어떤 작가라고 호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와 다른 규칙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 이곳과 다른 규칙으로 돌아가는 세상, 우리의 기준과 전혀 다른 기준이 ‘정상’인 상황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아주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아름답기까지 하니 심히 놀랍다. 불화하는 규칙과 기준 때문에 생기는 갈등이 그저 격랑 속에 흩어지는 게 아니라 아주 아름다운 장면으로, 그보다 더 감동적인 다음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치, 우주는 외롭고 무섭고 아름다운 곳이니 그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들 또한 외롭고 무섭더라도 한편으론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달리 무어라 더 쓸 수 있을까? 이미 완벽하게 아름다운 작품에 대고 어떤 상찬을 늘어놔봤자 넋 빠진 감탄사밖엔 안 될 것이다. 단권으로 묶이길 오매불망 기다렸던 단편들이 드디어 통일된 모습을 갖춰 출간돼서 기쁘다. 다른 초기작들도 늦지 않게 복간되어 새로이 독자들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김보영 작가가 빛나는 신간을 선물해줄 그 날을 늘 기다릴 따름이다. - 문목하